웬 때아닌 갈라치기?
웬 때아닌 갈라치기냐고? 아, 때는 맞는 것인가? 아무튼 싸움 붙이려는 얘기는 전혀 아니니 안심해도 좋다. 필자는 초등교사다. 많은 초등교사들이 교대, 초등교육과 출신이다. 교대 교육과정을 거치는 동안, 대부분 한 번씩 생각해 보게 되는 주제가 있다. 그 주제는 바로 '학창 시절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누구인가'이다.
내가 주로 떠올렸던 선생님들의 공통점은 모두 고등학교 선생님들이셨다. 거쳐온 담임선생님들 성함은 다 기억이 나는데도, 유독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시간이 많이 지나서인지 기억나는 추억이 잘 없다. 그래서인지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기억상실증 환자를 사랑하는 것'과 같다던 어떤 아버지의 이야기가 퍽 공감이 되기도 한다.
교사 전문성 담론, 누가 주도해야 하나?
미안하다. 이거 보여주려고 어그로 끌었다.
덴마크 曰 고등학교 교사
지난 글들에서 북유럽의 여러 국가가 공통으로 교사 전문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공유한 바 있다.
북유럽(주로 노르웨이)의 전문직성 담론을 소개한 글 :
https://www.koreateachers.org/news/articleView.html?idxno=2711
그리고 그 양상은 제각각이었다.
핀란드와 스웨덴의 차이를 소개한 글 :
https://www.koreateachers.org/news/articleView.html?idxno=2517
오늘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비교하고자 한다. 두 나라의 교육계는 역시 비슷한 상황에서 시작하였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교사 전문성 담론이 이어졌다. 바로 고등학교 교사 vs 초등학교 교사이다(가나다순, 여기서 고등학교 교사는 덴마크의 김나지움 교사를 주로 말한다. 김나지움은 우리나라에 딱 맞아들어가는 학교 형식이 없다. 굳이 따지자면 특목고, 자사고랄까.).
우선 덴마크와 노르웨이 두 나라에는 '김나지움 전통'이라는 공통의 출발점이 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덴마크는 이러한 김나지움 전통을 꾸준히 지켜왔다. 덴마크 사람들에게는 교육제도에 대한 자부심과 믿음이 있었고 전통을 수호하고자 하는 의지도 있었다.
김나지움(Gymnasium)은 세간에 알려진 바와 같이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의 추천서가 있어야 입학할 수 있으며 (이른바 될성부른 싹이어야 한다) 졸업 시험이 매우 엄격하다. 덩달아 선택된 엘리트를 키우는 전통을 지니고 있으니 엘리트를 가르치는 김나지움 교사들은 자연스레 사회적으로 우러러보는 대상이 되었다. 김나지움 교사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교수와 초등교사 중간 즈음에 위치시켰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덴마크 교사들이 교과교육, 특히 교과교육적 지식을 전문성 확보 방법으로 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이에 따른 장점은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사회적 존중을 확실히 확보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일반인들이 소화하기 어려운 걸 가르치는 사람들이니 자연스레 대단한 사람들이다라는 생각이 자리잡은 것이다. 이에 교육 정책 결정과 절차 등에 교사들이 자주 불려 갔고 대화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겨졌다. 특히 김나지움 교사들은 정부의 정책 파트너이자 생적인 비판자로서 존중받았다.
단점은 가르치는 학생들의 나이가 어려질수록, 즉, 취급하는 교과교육 내용이 쉬워질수록 그 전문성의 영향력이 떨어진다는 데에 있다. 물론 교사라는 직업 전반이 전문직으로 인식되는 경향 덕분에 일종의 낙수효과를 누릴 수는 있었겠지만, 초등교사의 경우에는 김나지움 교사들의 사회적 지위와는 다른 대우를 받게 되었다. 교사들끼리야 1+1을 가르치는 것이 2의 제곱근을 가르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외부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교급별 대립이 심화되었다.
노르웨이 曰 초등학교 교사
반면 노르웨이는 김나지움 전통을 해체했다. 그래서 모든 김나지움 교사는 '종합 후기 중등학교 교사'로 불리게 되었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김나지움 전통을 엘리트주의를 양산하는 시대착오적 제도로 보았다. 특히 교사 훈련원(우리나라로 치면 교대) 출신의 초등교사들이 그러했다. 김나지움 전통이 자리를 비운 곳을 채운 것은 초등교사 중심으로 재편된 교사 노동조합이었다.
기본적으로 초등학교 교사의 존경과 자율성은 동네에서의 훌륭한 사람으로서 역할모델, 지역 공동체의 지도자와 같이 비교과적인 측면에서 나왔다. 그들은 이러한 자원을 활용해 국가 정치에 적극 참여했다. 이들은 학교 체제를 전반적으로 통합하는 방향으로 교육 정책이 운영되기를 원했다. 즉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장벽을 최대한 허무는 방향을 추구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전문성의 근거를 교과교육이 아닌 교육 방법론, 교수법, 교육심리학, 공동의 전문가적 행동, 학생중심 교육과정에 대한 신념 등에 두게 되었다.
장점은 명확했다. 초등교사를 중심으로 한 노동조합의 힘은 교사들이 직접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도왔다. 모든 교사 집단이 통일되어 만들어진 노르웨이 교사노동조합과 최우수당(par excellence)이라는 노르웨이의 초등교사 정당은 막강해진 교사 집단의 힘을 상징한다. 교사의 역할을 촉진자와 동기부여자로 전환하여 새로운 교육 담론들을 소화하는 데에 유리한 것 또한 장점일 수 있겠다.
하지만 단점도 따랐다. 더 이상 교사 집단에는 전문가 조직이 남아있지 않았다. 교사조직은 노동조합으로만 이해되었다. 나름대로 노동조합 안에서 교사 전문성을 추구하는 목소리들이 나왔지만, 유의미한 성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따라서 비대해진 정치적 영향력과는 어울리지 않게 교육 정책 담론을 논하는 자리에서는 어쩐지 점차 밀려나게 되었다. 정부는 소수의 교수만 전문적인 소통이 가능하다고 믿기 시작했다. 교육개혁 국면에서 교사가 설 자리는 사라졌다. 특히 주변화된 종합 후기 중등학교 교사들은 교육전문가로서의 발언할 기회와 자율성을 잃었다.
한국의 선택, 덴마크의 길? 노르웨이의 길?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길로 나아가야 할까? 우리도 교사 양성 과정이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 사범대(교직 이수를 포함한)와 교대가 그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에 김나지움 전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덴마크의 김나지움 교사와 우리나라의 고등학교 교사는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많은 것 같다.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의 수백 년 동안의 역사적 분화가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예컨대 서원에서 가르치던 선비 전통이 중등교사로 갔다든지, 서당의 훈장 전통이 초등교사로 향했다든지 이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따라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논의 배경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 논의와 관련이 될 만한 요소들은 예상해볼 수 있다.
첫째, 사교육 시장 활성화라는 현실은 교과 전문성을 통한 범국민적 존중을 받아내기는 어렵게 한다. 단순히 어려운 내용을 가르친다고 해서 전문성을 인정받기에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녹록치 않다. 아무런 제약없이 하루 종일 강의식 수업을 준비하는 인강강사와의 비교우위를 점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힘들기 때문이다.
학교 교사는 다사다난한 업무와 직업윤리와 같은 (교과교육 측면에서만 볼 때) 모래주머니를 달고 대기업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일타강사와 경쟁해야 한다. 심지어 우리나라에는 김나지움 전통이 없다. 따라서 중등교사들이 교과교육만을 중심으로 사회적 존중을 받아내고, 교사 전문성을 재구성하는 과정은 우리나라에서는 요원하다.
한 마디로, 덴마크 모델은 어렵다.
둘째, 초등학교 교사 단일 대오로 나아가다 보면, 정책에서 점차 소외될 수 있다. 현재 2023년의 바람을 바탕으로 몇몇 초등교사 출신 정치인들이 국회에 입성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물론 이들이 대표하고 있는 교권 회복이라는 시대정신이 있다.
그렇지만 중등교사들을 잊으면 안 된다. 노르웨이를 생각하라. 초등교사 일변도로는 한계가 따른다. 역풍도 맞는다. 목소리가 커진 지금이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위기일지 모른다. 자기네만 생각하는 강력한 집단이라는 이미지는 쉽게 생성되지만, 쉽게 벗겨지지는 않을 테다. 교사들의 아픔을 치유하면서도 교사들의 통합까지 이끌어야 하는 그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회적 과제가 막중하다 하겠다.
한 마디로, 노르웨이 모델은 반면교사다.
결론
규범적이고 당연한 결론이다. 교사들끼리 대화를 많이 해야 한다. 특히 중등과 초등, 초등과 중등끼리도 말이다. 서로가 공감할 수 있는 전문성 모델을 찾아야 한다.
실제로 초등학교 교사와 중고등학교 교사가 서로 다른 이유로 교사 전문성에 회의감을 보이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초등교사는 '정의하기 너무 어렵다'는 이유로, 중고등학교 교사는 '정의하기 너무 쉽다'는 이유로 말이다.
초등학교 교사는 정의하기 너무 어려운 개념이니 교사전문성으로 교사들이 하나로 뭉치거나 함께 논의하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중고등학교 교사는 정의하기 너무 쉬운 내용(교과교육 전문가)이므로 학교 교사가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로 낙인찍히고 배제되기 너무 쉬워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난 글들에서 만났듯 교사 전문성 논의는 필연이다. 끊임없이 시도하고 부딪쳐야 할 실존적 문제인 셈이다.
실천아레나는 교육과 관련한 다양한 의견들이 오고가는 뜨겁고 건강한 논쟁의 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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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7 15:20~17:00, 「북유럽의 교직과 교사」, 「비난받는 교사」(유성상, 김민조 공역) 북토크, (강연 및 대담 김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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