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며들다? 풍수지리와 우주공학
파묘의 끝물이 오고 있다. (빨리 글을 완성하자.) 혹시 모른다. 1000만 관객을 달성하면 다시 탄력을 받을지도. 영화를 둘러싼 갑론을박이 있지만, 오컬트 장르를 '표방'한 영화가 1000만(24.03.16 현재기준 관람객 약866만명)을 바라보고 있으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학생 시절 옆방 살던 형님이 공포/스릴러 장르를 좋아한 덕분에 고전 공포/스릴러의기본기를 차근히 다졌던 필자로서는 흥행 영화의 장르가 다양해지는 것이 퍽 기쁘기도 하다.
이왕 주제로 영화 파묘를 소환했으니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대사 하나 정도를 인용할 수 있겠다 싶다. 배우 최민식은 극 중 풍수지리를 꿰고 있는 지관(地官)이다. 지관은 풍수지리를 바탕으로 묫자리와 집자리를 봐주고 삯을 받는 직업이다.
지관 상덕(최민식 분)은 자신의 의뢰인에게 딸의 직업을 질문받는다. 상덕이 카이스트 출신으로 우주공학을 공부해 독일에서 근무하는 자신의 딸의 근황을 자랑스럽게 말하자 의뢰인은 아버지와 딸의 직업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헛웃음을 친다. 그러자 상덕이 말을 얹는다.
풍수지리와 우주공학은 거의 똑같다.
삼라만상을 관찰하는 자연과학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영화에서는 정말 그렇다. 어쩌면 파며든('파묘에 빠져든'의 줄임말을 기반으로 한 신조어) 사람들에게는 더러 실재로 그럴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영화다. 그러므로 전문직성은 질문받는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벌어질 법한 일을 현재로 끌고 들어와서는 아니될 것이다. 다원주의 세상 속에서 각자 무엇을 믿을지는 자유다. 전통 토속신앙을 가진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공적인 이야기를 할 때는 이를 삼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 또한 꼭 지켜져야 할 규칙이다 싶다. 이를 고려하면 우리 교사들이 놓인 상황은 심상치 않다.
지난 글에서 잠시 언급한 『북유럽의 교사와 교직』이라는 책의 또 다른 저자 쇨비 마우셋하겐(Sølvi Mausethagen)은 노르웨이 오슬로메트로폴리탄대학교에서 교사연구센터에서 교사전문성과 교육정책에 대해 연구하는 교수다. 그는 노르웨이의 교사 전문직성 담론의 등장 과정을 철저하게 분석하여 세계의 교사들에게 다가온 미래를 경고한다. 곧 교사라는 직업은 전문직성에 대해 질문받을 수밖에 없다고.
전문직성이란 사회 혹은 국가가 전문직으로 대우해 줄만한 특성이다. 그렇다면 교사 전문직성에 대한 물음이란 교사라는 직업에 과연 전문직의 특성 즉, 전문성이 있느냐를 묻는 것이다. 이는 교사의 가르칠 수 있는 권한이 끊임 없이 사회적 논쟁의 주제가 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과 맞닿아 실제적인 문제로 다가온다.
학원 선생님이나 인터넷 강의 강사가 학교 선생님보다 교과를 더 잘 가르친다는 허탈한 지탄과 돌봄이나 늘봄이나 담임이나 그게 그거라는 어이없는 문제제기는 사실상 교사라는 직업에 과연 전문성이 있는가?라는 질문의 출발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위로부터의 전문직화와 안으로부터의 전문직화
일단 교사라는 직업을 지닌 사람들에게 전문성이 있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바라는 바다. 교사들은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어서 좋고 자신들의 영역을 안정되게 만들 수 있으니 좋다. 교육을 받는 학생과 좋은 교육을 받길 바라는 보호자들에게도 좋다. 그러다보니 (기본적으로는, 돈 문제가 아니라면.) 국가에서도 좋다. 그래서 전문성을 갖추려는 노력은 어렵지 않게 정당화 될 수 있다.
그러나 마우셋하겐에 따르면 전문성을 추구하는 방법론에 있어서는 현저하게 대비되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위로부터의 전문직화와 안으로부터의 전문직화가 그것이다(이러한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줄리아 에벳츠-Julia Evetts-로 알려져 있다.).
위로부터의 전문직화는 주로 정부의 구상을 교사들이 감당해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언뜻 가장 효율적일 것 같지만 각종 연수를 강조하고 교육 현장의 실상이 반영되지 않는다는 단점 때문에 아쉬움을 낳는다. 한편 책무성의 무한한 강조 때문에 교사들에 대한 무한기대가 심어진다. 노르웨이 정부 보고서는 이를 '지층 위에 지층'이 쌓이는 퇴적물과 같다고 비유한다. 큰 기대는 결국 어떻게 될까? 그렇다. 곧 실망으로 이어지게 된다.
반면 안으로부터의 전문직화는 자율성을 담보한다는 측면에서 강점을 지닌다. 심지어 교육 현장의 실상을 잘 반영할 수 있고, 전문성의 확보가 교육 실천으로 이어지기 더욱 용이하다는 장점도 지닌다. 그러나 안으로부터 전문직화의 움직임은 결국 기관의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는 한계를 지닌다. 돈도 조직도 부족한 자발적인 움직임의 아쉬운 한계지점인 것이다.
노르웨이는 어떻게 했나?
따라서 마우셋하겐은 위로부터의 전문직화와 안으로부터의 전문직화가 황금률을 이룰 때 교사 전문직성 담론이 긍정적인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 물론 그 역시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노르웨이의 사례를 들어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노르웨이의 전문직성 담론은 크게 세 갈래로 구성되었다. 첫째는 도구적 관점이다. 이는 연구 기반 실천을 강조한다. 즉, 교육 연구는 도구고 이를 잘 실천할 수 있는 교사들은 전문성을 지닌 교사라는 관점이다. 예를 들면 PDC교육 전문가, 연구기반 놀이교육 전문가, 비고츠키식 교육 전문가 등은 해당 전문성을 갖춘 것으로 인정받는다.
둘째는 관계적 관점이다. 이는 실천 기반 연구을 강조한다. 즉, 실천을 먼저 해본 뒤 이를 연구로 잘 갈무리 해낼 수 있으면 전문성을 지닌 교사라는 관점이다. 예를 들면 AI교육을 기반으로 한 현장연구 전문가, 학급 운영 방법론 연구 전문가, 보드게임 교육 전문가 등은 자신의 교육 실천을 기반으로 연구를 완수했을 때 비로소 전문성을 갖춘 것으로 인정받는다.
셋째는 비판적 관점이다. 여기서는 교육학을 강조한다. 이론과 실천의 통합으로서 교육학이라는 교과와 관련된다. 예를들면 아동에 대한 이해, 교육 철학에 대한 이해, 심지어는 교직관에 대한 이해를 갖춘 교사가 전문성을 갖춘 교사다. 이는 구체적인 개별 교육 현장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교육학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적이고 메타적이다.
마우셋하겐은 관련된 논의의 전반이 '실천교육학'에 대한 논쟁이라고 정의한다. 즉, 교직을 어떻게 수행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논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는 노르웨이의 교사 전문직성 담론이 다른 담론에 '승리했다'고 평한다. 즉, 교사에 대한 다른 담론은 전문직성 담론에 묻히고 있다. 물론 이것은 교사의 전문직화가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전문성에 대한 논의가 교직사회의 가장 중요한 논의로 떠올랐다는 의미다. 이 대목에서 우리 단체의 이름은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교육이 샤머니즘이 되지 않으려면
지난 글에서 필자는 교사와 의사를 비교했다. 오늘은 교사와 무당을 한 번 비교해보겠다. 벌써 기분이 나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선무당이 사람잡는다는 표현처럼 대개 무당의 이미지는 음험하고 좋지 않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자. 교사는 정말 무당과 다른가? 교사나 무당이나 그게 그거라는 도발이 들어온다면, 당신은 어떻게 여기에 대답할 수 있겠는가.
만약 교사들이 전문성에 대한 내부적인 논의가 없고 전문성을 안으로부터 기르려는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조만간 이런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여야 할지도 모른다.
교사와 무당은 거의 똑같다.
근거는 명확하진 않은데 몇몇에게는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정해진 비극적 결말도 공통점일지 모른다.
좁은 땅에 더이상 명당이 없어 망해가는 지관, 좁은 땅에 아이가 없어 망해가는 교사.
그러니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라는 말은 부족하다. 교사들은 설명을 만들어 내고 끝끝내 관철해야할 운명에 처해있다. 그래도 우리는 "교사 전문직성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전문성을 갖춰나가기 시작한 것이다"라는 마우셋하겐의 언급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좋으나 싫으나 '실천교육'을 모토로 하는 실천교육교사모임 홈페이지에 발을 들여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전문성 신장의 초입에 와있다.
(실천교육과 전문성을 밀접한 개념으로 사용한 기존의 논의는 다음 글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천교육교사모임은 왜 그런가? : https://www.koreateachers.org/news/articleView.html?idxno=2140
실천교사는 뭐하는 곳이야? (下) : https://www.koreateachers.org/news/articleView.html?idxno=2414)
이 글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안으로부터의 전문직성을 갖추어 나가고 위로부터의 전문직성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실천교육교사모임을 함께 만들어 나가면 좋겠다.
실천아레나는 교육과 관련한 다양한 의견들이 오고가는 뜨겁고 건강한 논쟁의 장입니다.
참여를 원하시는 분들은 메일을 보내주세요. koreateacher33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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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7 15:20~17:00, 「북유럽의 교직과 교사」, 「비난받는 교사」(유성상, 김민조 공역) 북토크, (강연 및 대담 김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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