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

한희창 실천교육교사모임 기획조정실장(’기획조정실장은 너무 딱딱하다. 아래부터는 부르는 말을 선생님이라고 하련다.)에게 톡을 보냈다. 한희창 선생님에겐 스스럼없이 아무 얘기나 던진다.

 

이거 조금 예민하게 지껄이는 건데,

실천아레나는 교육과 관련한 다양한 의견들이 오고가는 뜨겁고 건강한 논쟁의 장입니다. 참전을 원하시는 분들은 메일을 보내주세요.‘

에서 참전이라는 말이 걸려. ’건강한 논쟁의 장을 원한다면서 참전이라는 말을 쓰는 건 모순적이야. 굳이 전쟁에 참가한다는 참전이라는 표현을 써야하나? 논쟁이 전쟁인가? 사람 죽고 죽이는? 하긴, 현실의 논쟁은 그렇기도 하지. 죽고 죽일 듯 쓰지 글을.”

 

인용한 저 문구는 실천사설실천아레나로 바뀌고서 글 끄트머리에 새로 덧붙여진 말이다.

 

건국전쟁

이렇게 예민해진 건 건국전쟁탓도 크다. 나는 건국전쟁다큐멘터리 영화를 영화관에서 봤다. 엄마 모시고 한 번 보러갔다 오라는 아빠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보고 싶어 하시는 엄마를 위해서 내 이념 따위는 잠시 안 보이는 깊은 곳에 처박아 둘 수 있었다.

영화를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고 많은 것들이 궁금해 졌다. 이미 알만큼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이승만과 그 언저리에 대해 많이 찾아봤다. 이 예민한 시국에 이 예민한 인물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건드리고 싶은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사람 목숨이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 사람 목숨은 파리 목숨이었다. 사람 목숨이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고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그 시절 처참하게 살아갔던 사람들 하나하나의 삶을 생각하면 피눈물이 난다. 모든 게 전쟁이었다. 한국 전쟁만 전쟁이 아니었다. 전쟁 와중과, 그 앞뒤로 일어났던 집단 학살과, 삶의 모든 순간이 전쟁이었다.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면 안 된다고, 어린아이처럼 다시금 다짐했다.

 

비약

건국전쟁에서 그 시대에 있었던 전쟁의 참상을 생각하고, 거기서 다시 애꿎게 실천아레나를 소개하는 문구 중 하나인 참전을 떠올려 문제제기하는 건 오버고 비약일 수 있다. 알다시피 이미 우리 삶 곳곳에 전쟁 관련 용어들은 깊숙이 파고들어 있어 다들 쓰는 줄도 모르고 쓰고 있다. 혹은 알면서도 크게 문제의식 없이 쓰고 있다. ’참전이라는 말만 그렇겠나. ’입시 전쟁‘, ’승전보를 울리다‘, ’도화선‘, ’전열을 가다듬다. 특히 스포츠 용어는 거의가 전쟁 용어다.

사실 전쟁관련 용어들을 일상에 들여와 쓸 때는 당연히 비유적인 의미로 쓴다. 진짜 사람을 죽이겠다는 의미는 아닐 테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이 전쟁 같은 현실을 그대로 가져온다는 의미에서, ’현실 반영의 의미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말 하나하나를 갖고 꼬투리를 잡기 시작하면 정말 피곤해 지고 말의 자연스러운 흐름은 끊어지기 마련이다. 그 사람이 하고자 하는 말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말의 겉모습만으로 그 사람과 글을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경우도 많으니 꼬투리는 적당히 잡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참전에 대한 나의 꼬투리가 나는 조심스럽다.

그러나 우리는 교육을 하는 사람들이다. 아이들을 대하는 사람들이다. 되도록 어려운 말보다는 쉬운 말을, 사람을 죽이는 말보다는 살리는 말을 쓰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조금 더 신중하게, 조금 더 고민하며, 조금 더 조심스럽게 쓰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논쟁이라는 게 어디 평화롭기만 하겠나.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을 들으면 피가 거꾸로 솟고 상대방을 비판하는 걸 넘어 비난, 인신공격으로 넘어가기도 한다. 그야말로 전쟁처럼 상대방을 글이라는 총으로 죽이기 일쑤다. 우리의 논쟁 문화는 주로 그렇다. 진보고 보수고 마찬가지고 때로 정의를 선점한(했다고 착각하는) 진보가 그런 경향이 오히려 더 크기도 하다. 우리가 보고 겪은 논쟁, 토론 문화는 언제나 그래왔다. 그런 의미에서 실천아레나를 설명하며 참전이라는 낱말을 쓴 건 현실을 반영해도 너무 잘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는 분명 건강한 논쟁의 장이라는 말을 썼다. ’건강한 논쟁을 원한다면 전쟁처럼 상대방을 도려내 죽이는 논쟁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그런 의미에서 참전이라는 말을 쓰는 건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참전을 원하시는 분보다는 참여를 원하시는 분이 조금 더 낫고, 개인적으로는 함께 하길 원하시는 분이 더 좋다. 정답이 따로 있을 것 같진 않다.

 

참전이라는 낱말 하나 따위

한희창 선생님과 대화를 하다 보니, 내부에서 저 문구를 정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랬을 것 같다. 뭐 하나도 쉬운 게 없다. 앞에 나서서 하는 사람들은 정말 생각하고 고심해서 만든 건데 나처럼 뒤에서 방관하는 자가 비판하기는 참 쉽다. 혹시 이 글로 불편해질 분들이 있을까 염려되고 미안할 따름이다.

이 글이 올라가고 참전은 어떻게 될까? 일단 이 글이 올라갈 수 있을지부터가 관건이겠지만 실천의 포용력으로 봤을 때 충분히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 ’참전이 다른 낱말로 바뀌지 않아도 괜찮다. 서운하지 않다. 내 말이 뭐라고 서운해 하겠는가. 내 말이 무조건 옳다는 독단에 빠졌을 때나 생기는 감정일 텐데, 나는 독단에 빠지지 않을 것(?)이므로 서운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 테다.

무엇보다 앞에서 얘기했듯, 말의 겉모습보다는 내용이 더 중요하다. ’실천사설때부터 보아온 실천아레나의 모습은 나름 다양한 생각들을 품어 안으며, 자기비판에도 열려 있었다. ’건강한 논쟁의 장이 다른 어떤 단체보다 비교적 잘 구현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참전이라는 낱말 하나 따위야 뭐가 그리 중요한가.

실천아레나는 교육과 관련한 다양한 의견들이 오고가는 뜨겁고 건강한 논쟁의 장입니다.

참여를 원하시는 분들은 메일을 보내주세요. koreateacher33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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